리뷰

영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희대의 괴작

영화는 시대의 아픔을 반영한다.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낸 시대의 한 풍경을 미학으로서 재현한다. 때론 직설적으로, 때론 은유적으로…. 두 개의 극단은 현대사의 아픔을 표출하는 우리들의 표정과도 닮아있다. 그런 면에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하, 나그네)는 무표정한 영화다. 저주처럼 나열되는 죽음과 이별의 반복에도 주인공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더 슬픈지도 모르겠다.

알려진 대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분단의 비극을 ‘귀로(歸路)를 상실한 나그네’의 이미지로 은유한 작품이다. 영화는 비극의 정서를 화면 가득 채우지만, 직접적으로 서술하거나 묘사하지 않는다. 관객이 감지할 수 있는 재료의 정보는 영화 중반, 무감각하게 재생되는 전쟁의 인서트(Insert) 뿐이다. 나머지는 수종과 최 간호사의 무의식 속 퍼즐에 흩어놓는다.

영화의 흐름은 대략 이렇다. 어느 겨울, 수종이라는 남자가 3년 전 사망한 아내의 유골함을 들고 길을 나선다. 그는 이북(以北)이 고향인 아내의 유골을 뿌릴 자리를 찾고자 막연히 동해로 향하고, 속초의 물치라는 곳에 내린다. 수종은 이곳에서 세 명의 여성을 만난다. 그가 만난 여자들은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죽은 아내와 닮았다. 수종이 처음 만난 여성은 노인의 병수발을 들고 있는 간호사 최 씨였다. 그는 중풍 걸린 노인을 ‘월산’(지도에는 없다. 다만 휴전선 너머인 듯한 인상만 준다)까지 데려다 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거절한다.

다음 만나게 되는 여자는 여관에서 만난 매매춘 여성이다. 여관에서 화투를 치다 만난 여자다. 그녀는 원인 모를 구토 후 죽는다. 수종은 경찰 조사를 피해 여관을 빠져 나와 다른 주막에서 또 한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상중의 차림을 하고 어린 딸을 데리고 주막에서 매매춘을 하고 있다. 수종은 그녀와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다음날 어제 만난 그 여성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내까지 포함하면 수종과 인연을 맺은 세 명의 여성이 유명을 달리한 셈이다.

영화는 이 세 죽음을 몽환적으로 그린다. 수종은 유골을 품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플래시백 되는 아내의 환영에 시달린다.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내의 죽음과 연결된 수종의 죄의식처럼 느껴진다. 아내의 죽음은 뒷 죽음들에 비해 선명하다. 하지만 재차 반복되며 현실과의 경계가 무너지고, 두 죽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어쩌면 닮음이나 죽음 자체도 환각일지 모르겠다)

세 번째 죽음에 직면한 수종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 ‘월산’으로 향한다는 최 간호사를 찾아 나선다. 이 시점에서 “왜 그녀를 찾게 됐는가?”에 대한 물음이 남지만, ‘운명적’ 이끌림이라는 생각이다. 최 간호사 역시 첫 만남에서 수종과의 만남을 직감했을 수 있다. 그것은 영화 <나그네>의 ‘전생’의 세계관하고도 부합한다.

최 간호사는 수종과 재회한 후 예견된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물가에서 등에 관(棺) 세 개를 쥔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가 전생의 남편이다”라는 무녀의 점괘다. 이 장면에서 최 간호사는 수종에게 ‘손금’(손금은 영화 <나그네>의 중요한 메타포(metaphor)다)을 보여 달라고 채근한다.

하지만, 수종은 손금을 보이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애달픔이 폭발하는 순간은 이 다음이다. 수종과 최 간호사는 뒤엉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수종은 이내 포기한다. 자신과 관계한 세 명의 여성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외면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한 수종은 그녀와의 사랑을 꿈꾼다. 동시에 그의 죄의식과도 같은 아내를 떠나보낼 용기도 얻는다. 눈 속에 아내의 뼛가루를 뿌린다.

하지만 운명은 수종에게 관대하지 않다. 최 간호사에게도 역시. 영화는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강’ 선착장 시퀀스에서 다시금 비극으로 회귀한다. 최 간호사와의 재회를 약속하고 떠나는 길. 홀로 남겨진 최 간호사는 선착장 주변에서 행해지는 ‘굿판’을 바라보다 뜬금없는 ‘신내림’을 받는다. 정신없이 춤을 추는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는 수종은 산골짜기 느닷없이 등장하는 거대한 손바닥을 보고 비명을 지른 채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시공간은 모호하다. 서사구조 역시 고전영화의 연대기적 흐름을 거부한다. 비선형적이다. 과거뿐 아니라 미래까지 녹인다. 영화 중반, 아내의 플래시백과 함께 반복 등장하는 ‘굿’의 이미지는 최 간호사의 신내림 장면이다. 그 자체로 감독이 설정한 최 간호사의 미래다(동시에 수종의 미래이기도 하다). 이 같은 영화적 장치는 관객을 미궁에 빠뜨리며, 묘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이런 수수께끼는 끝에 이르러, 압도적인 손바닥의 이미지와 함께 폭발한다.

 

귀로를 상실한 시대의 나그네들

 

이 글의 앞에서 주지한 대로, 영화 <나그네>는 분단 비극에 관한 영화다. 하지만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노인’을 제외하고 주요한 인물은 전쟁과 분단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전쟁세대도 아니다. 전후세대로서 그들이 극중에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만남과 이별, 쾌락과 고통, 기억과 망각이라는 극단을 통속적으로 풀어간다(그것은 때론, 개연성 없는 막장드라마처럼 속성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포섭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서사는 귀로를 상실하고 방황하는 분단의 시대상과 결합하며 비극의 근원을 제공한다.

온통 의문투성이지만 가장 궁금한 건,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결말부다. 신내림과 거대한 손바닥 이미지…. 수종과 최 간호사가 자리한 공간과 전후 장면을 돌이켜 본다. 선착장 장면 직전, 탈을 쓴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기괴한 모습을 하고 렌즈 앞으로 다가온다. 그 때, 물안개 가득한 아우라지강 위로 무당배가 흘러간다. 아이들의 대화도 시작된다. 아이들은 굿판이 지난해 강에 빠져죽고 시체조차 찾지 못한 용석의 ‘오구굿’(망자를 염원하는) 임을 직감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 한 아이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용석의 ‘혼’(魂)으로 추정되는 귀신의 형상. 아이들은 기겁하고 도망친다. 그 앞으로 재회를 약속하는 수종과 최 간호사의 장면이 스친다.

종합하면, 선착장의 그 ‘굿’은 용석의 영혼을 위무하는 제의다.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강의 어느 지점을 떠돌고 있을 용석의 영혼과 귀로를 잃고 방황하는 두 사람의 상황을 빗대 표현한다. 이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감독이 은유코자 하는 분단의 비극과도 맞아 떨어진다. 때문에 신내림과 거대한 손바닥의 이미지는 회복 불가한 이산(離散)의 운명을 표현한 일종의 상징이 아닐까.

이 영화는 코리안 뉴웨이브(1980~1990년대 중반)의 기수 중 하나인 이장호 감독의 작품이다. 이제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 차이를 알 수 없지만, 당시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원작을 따랐다고 해도 이를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재현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여기에는 텍스트 이면의 콘텍스트(context)를 해석하는 감독 본연의 철학에 영향을 받는다. 이 영화가 기존 한국영화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도 세계를 바라보는 감독의 가치관이 적극적으로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제작된 시점은 1987년이다. 반공이데올로기가 대중문화를 점령한 시대였고, 군사정권의 폭압과 민주주의의 열망이 상존하던 모순의 시대였다. 분단을 소재한 한국영화라는 것은 반공영화의 다름이 아니었다. 이장호 감독을 필두로 배창호, 박광수, 장선우, 정지영 감독 등의 코리안 뉴웨이브가 태동한 이유도 이런 시대적 흐름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 전위의 정점에는 ‘분단’이 있었다. 반공의 속성을 제외하고 ‘분단’은 금기의 소재였다. 군사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이를 효과적으로 검열하고, 통제했다. 이장호 감독의 영화적 지평을 확장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역시 그 같은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이를 계기로 많은 분단 소재의 영화들도 등장한다.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 <하얀전쟁>(1993) 역시 비슷한 아픔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솔직히 코리안 뉴웨이브 시대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언뜻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지만, 외려 지금의 한국영화가 ‘올드’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회에 대한 연출자의 관점은 시장논리에 동화된 자본가의 시각과 같다. 과거 코리안 뉴웨이브가 지향했던 비판과 성찰, 실험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퇴행한 느낌이다. 작가적 배치보다 시장적 배치가 우선한다. 지금 한국영화의 현란한 CG가 <나그네>의 조악한 CG보다 압도적이지 못한 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철학의 부재 탓이다. 코리안 뉴웨이브로부터 30년. 영화 속 ‘수종’처럼 한국영화는 귀로를 잃은 듯하다.

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은게 많아요. 어느 순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하고 싶을 걸 택할 겁니다. 삶은 짧고, 불확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