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황우석의 반려견 복제, 찬양과 침묵의 기시감

황우석 박사가 귀환했다. 지난 2005년, 조작과 윤리 논쟁을 일으켰던 ‘줄기세포’ 복제로 복귀한 것은 아니다. ‘귀환’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황우석 박사는 지금껏 연구를 쉰 적은 없다. 황우석 박사는 지난 2006년 서울대를 떠나며 함께 연구했던 20여명의 제자들과 함께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을 설립했다. 연구원이라 명명 됐지만 이윤 목적의 회사에 가깝다.

이 회사의 수익모델은 ‘동물복제’다(사실 황 박사의 전공은 수의학이다). 단순한 동물복제는 아니다. 복제가 까다롭다고 알려진 개 복제다. 또한 그 개 역시도 단순한 개는 아니다. 생(生)을 다한 반려견이다. 황 박사의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은 세계 유일의 반려견 복제 특허를 소유한 곳이다. 이들은 펫로스(petloss)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반려견 유전자를 제공받아 복제하는 유일무이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개 한 마리 당 복제비용만 미화로 10만 달러(한화로 1억2천여 만원)에 이른다.

황 박사 연구팀에 따르면 지난 2005년 복제견 스너피 이후 현재까지 대략 700여 마리의 개를 복제했다. 이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언론은 반려견 시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미래 먹거리로 반려견 복제를 보도하고 있다. 황 박사 역시 언론에 관련 보도자료를 제공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직 황 박사 연구에 대한 윤리 목소리는 미약하다. 일부 동물보호단체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만, 공론화 분위기는 없다.

수암생명공학연구소는 지난 2005년부터 현재까지 700여 마리의 개를 복제했다

반려견 복제에 우려되는 것은 복제 난자를 제공하는 도너(doner)견과 복제견을 잉태하는 대리모견의 생명윤리다. 아직까지 반려견 복제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도너견의 난자가 제공되는지, 얼마나 많은 수의 대리모견을 필요로 하는지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이를 추측할 수 있는 언급은 있다. 동물 관련 월간지인 <비건>(Begun) 6월호에는 이형주 동물보호활동가의 <복제견은 죽은 반려동물의 ‘부활’일까> 라는 글이 실렸다. 이 활동가는 기고에서 미국 탐사전문기자 존 웨스텐딕의 저서 <개 주식회사>에 소개된 폭로 일부를 재인용하며 이렇게 정리한다.

“한국은 복제견 5마리와 복제 고양이 11마리를 얻기 위해 난자 ‘도너’로 319마리, 대리모로 214마리 및 3,656개의 배아를 사용했다. 한국에서 개 복제 기술이 발달한 이유가 ‘개’라는 동물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윤리적 잣대가 다른 국가보다 월등하게 낮기 때문이다.”

이같은 내용은 국내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반려견 복제 고객 대부분 국내 보다 국외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언론의 언급도 없다. 그들의 관심은 황 박사 연구팀의 경제적 성과에 그친다. 반려견 복제의 진실은 둘째로 치더라도, 이 같은 침묵에 기시감이 드는 건 당연하다. 10년 전 줄기세포 논쟁의 도화선은 불법적 난자 수급 문제였다. 줄기세포 연구에 수백, 수천의 매매된 불법난자가 쓰였고, 여기엔 여성 연구원의 난자도 사용됐다. 당시 황 박사는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새빨간 거짓이었다.

당시 한국사회의 폭력성은 황 박사 연구 자체에 있지 않다. 최후의 거짓이 드러나기 까지 한국사회가 취한 윤리적 태도에 있다. 노성일 원장의 폭로가 있기 훨씬 전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황 박사 연구에 불법적 난자가 사용됐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여기에 생명윤리 문제가 동반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 국민은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했었다. 국익 때문이다.  국민 모두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몇몇 희생은 숭고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생명윤리는 복제논쟁의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결정타가 된 것은 줄기세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황우석 사건 10년, 우리 사회는 달라졌는가?

치료되지 못한 동물복제의 비윤리성은 지금, 반려견 복제라는 또 다른 퇴행성 기억상실로 발병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동물복제 사업이 국내에서는 이윤 창출을 위한 수익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10년 전 생명윤리 논쟁의 당사자가 똑같은 문제를 들고 다시금 대중 앞에 섰음에도 아무런 비판이 없다. 뜻하지 않게 반려견을 잃어버린 주인의 슬픔은 당연하다. 그것은 때때로 삶의 극단적 순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극복을 위한 반려견 복제가 수많은 동물의 죽음과 고통을 전제한 결과라면, 그 생명은 무가치한 환영일 뿐이다.

얼마 전 우리를 경악하게 한 ‘강아지 공장’ 논란이 있었다. SBS <동물농장> 방영을 통해 전모가 드러났지만,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외면했던 타자의 고통은 그날, 참혹한 진실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 반려견 복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감정을 앞세운 복제가 있고, 슬픔을 이용한 비즈니스가 있다. “동물복지의 수준이 그 사회의 민주적 성숙도를 말해준다”는 격언이 뼈아프다.

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은게 많아요. 어느 순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하고 싶을 걸 택할 겁니다. 삶은 짧고, 불확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