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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경멸’ 고다르 – 자아 혹은 타자의 반영

 

경멸의 자기반영

어떤 영화는 화면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두 세계는 동질적이면서도, 이질적이다. 끝없이 서로를 반영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충돌한다.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접점. 이른 바, 고요하지 않은 ‘냉전’(冷戰)의 상태. 고다르와 그의 영화가 직면한 특유의 상황이다.

영화 <경멸>(Le Mepris)의 리뷰 전에 살펴볼 것이 있다. 그가 인접한 세계다. 고다르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기존의 기술화되고, 표준화된 영화 사조를 거부한다. 그 자체로 독자적 세계로서, 감독 개인의 사유와 성찰, 감각과 감성이 반영된 사적세계를 지향한다. 그 메시지에 관객이 포섭되는 가는 감독의 관심사가 아니다.

<경멸>은 고다르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독특한 작품이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경멸’의 대상은 이야기 흐름상 두 개다. 하나는 사랑한 대상에 대한 경멸, 또 다른 하나는 자본에 동화되어가는 영화에 대한 경멸이다. 두 개의 플롯은 외연적으로 폴이 직면한 하나의 상황에 포개지지만, 내연적으로 각기 다른 개별서사가 구성됨으로써 ‘이중플롯’의 구조를 띤다.

영화 <경멸>의 이 같은 구조는 감독의 의중이 아니다. 제작자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도 아니다. 외려, 우발적 결과물에 가깝다(이런 즉흥성은 누벨바그의 속성이기도 하다). 영화 <경멸>이 제작된 것은 20세기 중반이다. TV에 영화가 위협받던 시기다. 이때 등장한 것이 ‘블록버스터’(Blockbuster) 영화다. 최초의 블록버스터라 할 수 있는 <벤허>(1959)의 흥행으로 영화는 자본과 더욱 밀착한다. 막강한 자본력을 지닌 제작자의 입김도 세졌다. 제작자가 영화전반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제작자의 개입이 작품에 반영됐다.

영화 <경멸>(1963)은 그 근저에 놓인 작품이다. 고다르 영화 최초로 1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였다. 제작비는 미국인 투자자 카를로 퐁티와 조셉 리바인을 통해 조달했다. 하지만, 관계는 좋지 않았다. 고다르의 영화적 이상과 퐁티의 시장적 배치는 번번이 충돌했다.

그럼에도 고다르는 굽히지 않았다. 외려, 그 갈등을 영화에 녹였다(극중 프로코쉬가 필름을 걷어차는 장면은, 실제 제작과정서 있었던 사건이다). 고다르는 이 갈등의 전면을 극 초반과 후반, 직설적으로 드러내며 자본의 위세에 굴복해가는 영화산업에 대한 고민을 표출한다. 이중플롯의 한 축은 예술과 상업 사이 딜레마에서 탄생한 결과다. 그럼에도 플롯에 공통은 있다. 경멸의 전제다. ‘사랑’이다. 경멸이 탄생한 근원에는 결국, 사랑이 있었음을 폴과 카밀의 관계로서 은유한다.

 

<b>‘</b><b>낯섦</b><b>’</b><b>으로서 드러나는 것</b>

 

영화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영화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음을 밝히고, 이어 출연 배우들의 이름을 읊는다. 영화 초반과 후반부, 자막으로 표시하는 크레딧을 감독 육성으로 대체하고 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오프닝 화면구성이다. 감독의 내레이션이 재생되는 동안, 익스트림 롱-쇼트로 잡힌 화면의 소실점에서 극중 통역사로 등장한 프란체스카가 대본(?)을 읽으면 관객 쪽으로 다가온다. 그 옆에는 같은 속도로 프란체스카를 찍고 있는 촬영감독과 스텝이 보인다.

고다르의 내레이션이 끝나갈 무렵, 화면 바로 앞까지 도달한 카메라는 돌연, 위치를 바꿔 관객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리고 감독은 바쟁의 글귀를 언급한다. “영화란 그것을 통해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이어야 한다. 이 영화는 그런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란, 현실의 반영이다. 굳이 바쟁을 통해 제시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사실이다. 하지만, 관객이 이를 지각키는 어렵다. 고다르의 우려처럼, 영화가 자본에 잠식돼도, 관객은 주관적으로 개입하기 어렵다. 극에 몰입되는 만큼, 비판력도 약화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극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다르는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차용한다. ‘낯설게 하기’로 번역되는 소격효과는 본래, 연극이론이다. 극 진행 중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말을 걸거나, 무대장치를 노출시키는 등의 행위를 통해 관객의 과다 몰입을 억제하기 위한 연출법이다. 하여 관객은 극과 자신을 분리해, 극적 상황에 포획되지 않고 극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경멸> 오프닝의 ‘낯섦’은 고다르 본인이 직면한 현실을, 관객들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유도하는 장치인 셈이다.

영화 <경멸>은 3막 구조다. 장소에 따라 서사를 달리한다. ‘질서-무질서-질서’로 이어지는 고전 영화문법과는 다르다. 1막 스튜디오, 2막 아파트, 3막 카프리섬 장면으로 나뉜다. 특히, 폴 부부의 갈등이 점화되는 아파트 장면은 단일 시퀀스로는 유례없이 길다. 고다르의 전작 <네 멋대로 해라>의 방안 대화 신(Scean)을 연상시키는 2막은 둘의 다툼이 경멸에서 사랑으로, 다시 사랑에서 경멸로 치닫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렸다.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서사이기도 하다.

아파트 시퀀스에서 눈여겨 볼 것은 화면구성이다. 둘의 갈등을 미장센을 통해 극대화한다. 30분가량의 아파트 시퀀스가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는 대부분 고정돼 있다. 최소한의 트레블링만 시도한 채 장소만 달리한다. 반면, 인물들은 대화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다투며 수시로 벽과 문 사이를 오간다. 벽과 문을 하나의 단절된 프레임으로, 둘 사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배치는,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퀀스 말미에도 등장한다. 스탠드를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둘을 번갈아 비춘다. 깜박거리는 스탠드 불빛이 대화의 긴장을 더한다. 긴 대화에도 해소되지 않은 갈등은, 결국 총을 들고 뒤따르는 폴의 쇼트에서 3막의 파국을 암시한다.

 

<b>경멸의 탄생</b>

 

3막 카프리섬은 2막의 아파트 시퀀스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이미 접점을 잃은 폴 부부는 아무런 대화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저 무시할 뿐이다. 급기야 까밀은 남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프로코쉬와 키스를 나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내뱉은 폴의 회유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결국, 까밀은 남편에 작별을 고하고, 프로코쉬의 차를 타고 섬을 떠나지만 이윽고 발생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비극은 화면을 가득 채운 아내의 작별 편지와 이미지의 교차편집을 통해 극대화된다.

영화 <경멸>은 폴과 까밀, 프로코쉬와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인용한다(극중 프리츠 랑이 제작하는 영화의 소재이기도 하다). <오디세이아>는 주인공 율리시스가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에 도착해 아내 페넬로페와 재회하는 이야기다. <오디세우스>의 갈등 축은 <경멸>의 그것과 닮아있다. 율리시스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의심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그런 점이 못마땅한 페넬로페는 율리시스와 끝없이 반목한다. 3막 중반, 프리츠 랑 감독이 폴과 산책하는 장면에서 ‘왜 페넬로페가 율리시스를 경멸하게 됐는가’를 설명하며, 자연스레 <경멸>의 갈등과 일치시킨다. 그러면서 후반부 아내와 프로코쉬의 죽음을 <오디세우스>의 서사에 다시금 녹인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영화 <경멸>의 대상은 둘이다. 여기에는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그만의 고민이 묻어있다. <경멸>은 그 고민의 결과다. 단순한 서사지만, 독해가 어려운 이유다.

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은게 많아요. 어느 순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하고 싶을 걸 택할 겁니다. 삶은 짧고, 불확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