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민중의 적’ 과장된 붕괴 – 희석된 문제의식

연극 <민중의 적>을 보면서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그것은 연극 자체의 문제이기보다 대상의 문제다. <민중의 적>은 솔직하다. 직설적이고, 명료하다. 드러내고자 하는 지점이 매우 뚜렷하고, 선동적이다. 그것은 연극의 헤드카피 ‘다수는 항상 옳은가?’에서도 과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민중의 적>은 다수결의 원칙으로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신화’를 작품 속 사건과 인물을 통해 위력적으로 파괴한다.

연극의 주요한 서사방식은 ‘제시’다. 그리고 ‘참여’다. 후자에 이 연극의 성취가 있다고 믿는다. 동시에, 앞서 말한 ‘불편한 감정’의 시작도 여기에 속한다. 그것은 이 연극의 어떤 ‘무책임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개인적 잣대로 좋은/나쁜 작품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 딱 하나다. ‘여운’(餘韻)을 남기는 가다. 연극이든, 영화든, 작품이 끝난 뒤에도 관객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가 ‘고전’을 고전(古傳)이라고 부르는 이유에도 이 같은 사유가 깔려있다. 그런 측면에서 <민중의 적>은 충분히 그 역할과 기준에 부합한다. 메시지나 스타일도 매끄럽다. 그럼에도 ‘고전’ 혹은 ‘명작’이라고 부르는 데 망설여지는 것은 ‘사유’ 속에 작동하는 디테일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연극 <민중의 적>은 ‘다수는 항상 옳은가’라는 헤드카피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다수결 원칙이 작동하는 현시대의 모순을 고찰한 작품이다. 극작가 헨릭 입센의 작품을 독일 국적의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가 재구성했다. <인형의 집-노라>(2005), <햄릿>(2010) 등 다수의 문제작을 내놓은 연출가답게 이번 작품 <민중의 적>에서도 도발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관객을 우매한(?) 대중으로 극에 참여시키는 실험을 감행한다. 이 글을 통해 연극에 대해 논하고 싶은 지점도 바로 여기다.

'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장의 '관객'

작품 시작 전에, 연극은 관객에 하나의 글귀를 관객에게 입력한다. “나는 나다. 미국 운동화 회사의 이런 슬로건은 단순한 거짓말도, 단순한 광고 전략도 아닙니다. 선전포고이자, 전쟁구호입니다.(…) 세상은 따분하게 정돈된 차갑고, 공허한 공간이며 여기서는 등록된 인간, 분자화된 자동차, 그리고 이상적인 제품만 돌고 돌 뿐입니다.” 라는 문장. 이것은 중후반 스토크만 박사의 대중연설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읊어지기도 한다.

이 문장은 곧, 작품의 정체성인 동시에 선언이다. 19세기 후반, 마르크스가 말했던 ‘하나의 유령’처럼,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부속화한 주체를 거부하고, 능동적이고 개별적인 주체로 거듭나고자 하는 일종의 의식적 실천이다.

이는 <민중의 적>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적’의 실체와도 부합한다. 여기서 ‘적’은 무책임한 정부만은 아니다. 또 악덕한 기업도 아니다. 탐욕의 정치인도 아니고, 위선적인 언론도 아니다. 스토크만 박사의 대중연설에서도 나타나듯 다수인 ‘대중’이다. 우리가 비판하는 대상은 결국, ‘다수’라는 이름으로 획득된 ‘공식화한 권력’이다. 때문에 ‘대중’ 안에서는 능동적인 비판도, 성찰도 힘들어진다.

연극 <민중의 적>은 ‘양심상의 이유’로 이 같은 대중사회를 뚫고 나온 스토크만 박사의 투쟁기다. 때문에 주인공은 다수 논리에 포섭되지 않고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하다. 연출자는 관객의 ‘열린 사고’를 요구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을 다루는 연출자의 태도는 매우 명확하다. 이런 경우, 성찰이 아닌 계몽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라고도 보지 않는다.

계몽 역시 예술의 역할 아닌가. 문제는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연출자는 ‘대중사회에 대하 비판’을 위해 관객을 대중의 위치에 가져다 놓는다. ‘제4의 벽’의 허물어지는 순간, 극장은 객석도 재판장도 아닌 모호한 공간으로 바뀐다. 이러한 연출은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과시적으로 드러내며 현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를 관객들에게 요구한다.

스토크만 박사는 길고 긴 연설을 내뱉으며 대중사회에 대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비판을 한다. 그 뒤 다수논리에 포섭된 언론사 사장이 무대로 등장하며, 관객들의 의견을 묻는다. 그런데 관객의 입장이 특이하다. 그 누구도, 다수논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다수는 항상 옳은가”에서 “옳지 않다”로 변모한 관객의 주장은 극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다수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체제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연극의 모순을 드러내는 의도된 작업이라면 할 말 없다).

즉, 대중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해 차용한 ‘제4의 벽’ 붕괴가 역설적으로 대중사회의 정의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문제를 인지했는지, 객석 곳곳에서 극단에 고용된 ‘데블스 에드버킷’들이 포진돼 있다. 이들은 주로 주인공 스토크만 박사의 의견에 비판하며 극의 일관된 분위기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어색함이야말로 연극 <민중의 적>의 취약점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확정하지 않은 ‘결말’은 무책임함으로 귀결되고 만다.

기교가 모든 걸 대체할 수는 없다

이 연극의 ‘필리버스터’와 결말을 보며,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2015년 작품 <리바이어던>이다. 비판의 지점은 연극과 비슷하다. 이 영화는 러시아 북부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40대 가장 니콜라이가 자신의 땅을 노린 부패한 시장 바딤에게 맞서 싸우다가 처절하게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지독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 영화는 ‘국가권력’이라는 이름의 괴물(leviathan)을 개인과 대치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폭력의 실체를 체감하게 한다.

이는 관객을 작품 내부에서 외부로 소환시키지 않고도, 감독의 사유와 성찰로서 가능하게 한다. 연극 <민중의 적>이 말하고자 지점에 동의하면서도, 극에 공감(共感)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철학의 부재에 있다. 사유는 기교(技巧)로 하는 게 아니다.

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은게 많아요. 어느 순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하고 싶을 걸 택할 겁니다. 삶은 짧고, 불확실하니까.